열암 박종홍은 박치우, 신남철과 함께 현대 한국 철학의 기본 형태를 창조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박치우, 신남철은 강단 철학을 거부했지만, 열암은 대학교수의 길을 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열암(冽巖) 박종홍(1903~1976)은 박치우, 신남철과 함께 수학했고 그들과 더불어 현대 한국 철학의 기본 형태를 창조하는 데 공헌했으나, 이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길을 걸어갔다. 박치우, 신남철이 강단 철학을 거부하고 역사라는 운명 속으로 뛰어든 것에 반해, 열암은 줄곧 일반적인 학자(대학교수)의 길을 걸어갔다. 물론 그 역시 일정 기간 박정희 정권에 바다이야기 의 참여라는 역사적 맥락에 관여했으나, 이 행위는 박치우, 신남철의 그것과는 그 성격과 의미에서 판이한 것이었다. 상당량의 저서를 남긴 박종홍은 동서 철학을 횡단하는 그 사유의 넓이에서나, 특정 사유의 핵심을 읽어내는 사유 능력에서나, 또한 단아하고 중후한 글쓰기에 있어서나 20세기 한국 철학의 한 경지를 이루었다.
뛰어난 철학자의 사유는 릴게임5만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온 철학사 전체에 대한 고유의 이해와 평가를 내포한다. 열암은 동서고금의 주요 철학들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양한 사조들 전반을 자신의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향외적(向外的) 사유’와 ‘향내적(向內的) 사유’라는 틀이었다.
“[향내적 사유는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 精神(정신) 속에서 만들어진 소산을 감각을 통하여 밖으로부터 알려진 대상보다도 더 깊은 의의를 가지는 것, 세찬 박력과 항구성을 가진 현실이요, 외계의 대상은 오히려 덧없는 환영의 미혹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향외성은 生命力(생명력)이 외부를 향하여 외계의 가치를 무조건하고 인정하며, 이 대상이라는 통로를 경유하지 않은 사상이나 상상은 검증완료릴게임 결국 하나의 공상이라고 보는 것이라 한다.”(전집 III, 195p)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존 듀이.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암은 이런 관점에 서서, 예컨대 그리스 전성기의 향외적 사유와 말기의 향내적 사유를 대비시키 바다이야기슬롯 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향외적 사유와 독일 종교개혁 시기의 향내적 사유를 대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대비는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찬부를 떠나 철학사를 바라보는 참신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열암은 20세기에 이르러 나타난 대표적인 향외적 사유를 ‘과학철학’이라 부른다. 이는 오늘날의 의미의 과학철학이라는 분과를 가리키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철학들’, 외면(객관성)을 추구하는 철학들을 뜻한다. 이런 부류의 철학들 중 하나로서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을 들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진리의 규준을 예컨대 ‘명제와 사태의 일치’ 같은 기존 규정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의 효과, 유용성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프래그머티스트들에게 인식은 항상 행동과 결부되어 있다. 지식이나 관념은 어디까지나 삶을 위한 도구이다. 이 점은 존 듀이가 관념을 ‘행동의 계획’으로 정의한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프래그머티즘은 과거나 현재의 사유기보다는 미래의 사유이다. 그것은 역사적 성찰이나 현재의 서술보다는 늘 미래를 향한 계획과 행동에 방점을 찍는다. 프래그머티즘의 이런 성격은 미국을 이끌어간 ‘프런티어 정신’과도 통한다 하겠다. 열암은 이런 향외적 사유가 내포하는 “건설에 대한 진취적인 기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향외적 전진이 맹목적일 때 심각한 결과가 빚어질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향외의 발걸음은 늘 향내의 자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함을 지적한다.
향외적 사유와 달리 실존주의 철학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향내적 사유는 인간의 고유한 실존적 삶을 반성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그래서 그 주요 주제들도 향외적 사유와는 딴판이다. 죽음은 그 범형적인 예로서, “죽음의 無(무) 앞에서 비로소 나에게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일반으로 존재 자체가 그 전모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안 또한 실존주의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주제로서,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무에 직면케 하고 그로써 존재의 의미를 사유케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적인 자기를 깨닫고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에 있다. 예컨대 하이데거가 강조한 ‘선구적 결단성’을 통해 본래적인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열암은 이런 향내적 사유가 인간을 성찰적 존재로 만들어줌을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건설성이 희박함을 지적 아니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암은 향외적 사유와 향내적 사유라는 관점에서 철학사를 연구했거니와, 그 자신의 지향은 양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을 향했다. 그가 생각한 길은 향외 일방적인 사유를 비판하면서 향내로 향한 후, 향내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다시 향외를 향하는 것이었다. 향외 일방의 사유는 객관세계의 이치를 파악하고 그것으로써 세계를 개변해 나가는 과학적 활동과 그것을 떠받치는 과학철학이거니와, 이런 향외적 사유가 맹목으로 폭주할 때 (열암의 시대에 원자폭탄으로 상징되었던) 극한적 위험에 의해 인류는 걷잡을 수 없는 붕괴로 치달을 것이다. 이런 흐름을 비판하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려 한 것이 향내적 사유이며, 열암은 실존주의를 비롯한 향내적 사유에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향내적 사유가 내면으로만 기어들면서 고독, 불안, 무상성, 죽음 등과 같은 주제들에만 빠져든다면, 철학은 내성에 빠져 무기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길은 향내적 성찰을 통해 무반성적 향외를 극복하되 다시 향내의 한계를 성찰적 향외로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다.
“과학철학의 길은 자동조절의[cybernetic] 컨트로울이 과학만으로써 불가능함을 자인하게 되었고, 실존사상의 길은 개별적인 관념의 세계를 트긴 하였으나 그것이 그대로 현실적인 힘을 가지기에는 부족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회 참여가 요구되는 소이라고 하겠다.”(전집 III, 329p)
이런 맥락에서 열암은 과학철학적 사유를 전개하였으되 과학기술의 맹목성을 비판한 노버트 위너라든가, 실존사상을 전개하였으되 존재를 사유한 하이데거, 실천적인 사유를 전개한 사르트르의 노력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걸어가려 한 길은 동양철학의 길이었다. 그의 사유의 빼어남은 서양철학의 끝에서 동양철학으로 나아간 점에 있었다.



서양철학의 향외적 흐름과 향내적 흐름의 일방성을 극복하고자 한 박종홍의 귀착점이 된 유가철학. 사진은 공자.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렇다면 방대한 동양철학의 장에서 열암이 구체적으로 찾아낸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 열암은 동양의 철학은 서양과 달리 ‘존재’보다는 ‘무’를 사유해왔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태극을 사유할 때조차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역설함으로써 태극을 존재로서 못박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런 무의 형이상학은 특히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에서 발달했다. 노자는 무로서의 도가 천지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고, 이 도로써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 무의 불교적 버전이 ‘공’(空)이고, 불교철학은 무와 유의 중도의 길을 감으로써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의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열암은 노자의 철학에는 “형이상적 무에서 힘차게 돌아 나오는 면이 없다”고, 또 장자는 나비의 꿈에서 “꿈인가 현실인가 스스로 분간을 못 하였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도가철학을 비판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理法(이법)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적극적인 건설에 대한 구체적 연관성이 박약한 것을 염려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불교철학 또한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의 수준 높은 무의 형이상학을 평가하면서도, 이 철학들이 향내로부터 다시 향외로 나아가 건설, 실천, 창조로 나아가는 면이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한 경전인 중용은 박종홍이 추구하는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진은 중용장구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열암의 사유가 궁극적으로 닻을 내리는 곳은 곧 유가철학이다. 노자, 붓다와 달리 공자는 “무로 들어가는 면보다 무에서 나오는 면이 더한층 소중하”다고 보았고, 그를 따른 유가철학은 향내로 치닫기보다는 향외로 나아가 건설적인 사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암이 강조하는 것은 유가철학이 단순히 일방적인 향외적 사유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열암은 유가철학의 유는 어디까지나 무를 매개한 유임을 강조한다. 유가가 추구하는 ‘有’(유)나 ‘生’(생)은 무의 매개를 자각 못 하는 직접적인 유나 생은 아니다. “직접적인 유로서 가하다면, 곤란한 극기를 해야 될 리도 없을 것이다. 유교의 중용도 말하자면 유교의 중도와 마찬가지로 유를 부정한 무를 다시 부정한 묘유인 것”이다.(전집 II, 316p) 율곡이 성리학은 노불(老佛)을 흡수하면서도 그들을 넘어서는 것임을 강변한 바 있거니와, 열암의 생각에도 이런 관점이 스며들어가 있다고 하겠다.
열암의 사유 구도에서, 향내와 향외의 이분법적 구도의 극복은 동시에 동양에 의한 서양의 극복이라는 구도와 맞물려 있다. 이는 곧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기댔던 한쪽 극과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만들려 했던 다른 쪽 극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과학철학과 실존철학이라는 양극을 동시에 극복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는 곧 한편으로 신 같은 초월적 객관성이 아닌 ‘自然’(자연), ‘天’(천) 같은 내재적 원리를 사유의 초석으로 삼는 것인 동시에, 이 원리의 운행 안에서 인간(주체) 또한 일정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사유의 추구를 뜻한다. 열암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런 철학의 출발점을 ‘중용’에서 찾았다.
“동양사상은 (…) 자연에 있어서의 이치와 사람에 있어서의 이치를 떼어서만 생각하는 것을 옳은 일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오직 하나인 하늘의 命(명)으로서의 性(성)을 생각하였던 것이요, 그 性(성)을 발휘하여 다하는 곳에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문제 되었고,”(전집 II, 460p)
열암의 사유는 이렇게 서양철학에서의 향외적 흐름과 향내적 흐름의 일방성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극복의 귀착점으로서 동양철학의 중추로서 이어져온 유가철학의 길을 걸어간 것이었다.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