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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형이 죽었다. 갑자기 날아든 부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선배 소설가 이경자 누님이 전화를 걸어와 새삼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나보다 먼저 죽은 영현이가 미워 죽겠어.”
연보를 살피니 그가 등단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한 게 1984년이었다. 수십년 세월에도 엄존한 분단의 유산을 다룬 작품인데, 신인답지 않게 원숙한 경지를 선보였다고 해서 채무불이행 삭제 평단의 주목을 끌었다. 나의 경우, 그를 소설가로서 괄목하게 된 작품은 1980년대의 끝 무렵에 발표한 단편 ‘벌레’였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유신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어 군대까지 끌려간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었는데, 당시 비슷한 소재를 다룬 많은 소설들하고는 결 자체가 달랐다. 그의 주인공은 주어지는 시련을 극복하고 힘찬 미래를 빌라방공제 보여주겠다는 의욕 따위는 애초에 갖고 있지 않았다. 작가는 오히려 시련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는, 그러다가 마침내 벌레처럼 돼버리고 마는 주인공을 태연하게 내밀었다. 당대의 소설 문법과는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열광했다. 나 또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다. 따지고 보면 그건 나와 우 집 매매 절차 리 시대가 잊고 있던 소설의 가장 소설다운 미덕일지 몰랐다. 어쨌거나 ‘벌레’는 1980년대의 끝물이 아니라 1990년대를 새롭게 여는 마중물로서 그 의의가 상당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웠다.
유신시절 경험에 바탕 둔 단편 ‘벌레’ 당대 소설 문법과 결 자체가 달라 충격 90년대 새롭게 연 마중물…의의 상당
기업은행 예금금리 때마침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되느냐 마느냐 거친 파도가 밀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내가 속한 문단은 이념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던지기는커녕 외려 더 꽁꽁 싸매고 단추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87년 체제의 과실을 허망하게 놓쳐버린 운동권은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자고 나면 정파가 생긴다는 말이 돌 집합명사 정도였다. 문학도 온갖 정파와 진영의 논리를 충실히 답습했다. 솔직히 나로선 불러주는 데도 없었지만 딱히 가고 싶은 데도 없었다. 그때 김영현 형이 농담처럼 “우리는 ‘인생해방문학’이나 하지 뭐” 했는데, 꼭 그렇게 되었다. 딴은, 그건 뼈 있는 농담이었다. ‘벌레’의 작가로서 김영현은 작가들이 마치 사회과학의 청부업자처럼 되어가는 문단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등단 이후 줄곧 사회과학의 청부업에 종사한 쪽이던 나는 그런 그와 어울리는 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퍽 허술한 사람이어서 곁을 주는 일이 크게 어렵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가령 그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치면 어디 변두리 동네 여관에 진을 친, 저 흔한 철학원 출신인 양 새겨들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겁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만리장성 바깥의 서역까지 함께 누비게 된 것도 그 때문일 텐데, 어쨌든 보름도 훨씬 넘게 함께한 그 여행은 두번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된다.
1996년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주최로 연 제1회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셋째가 소설가 김영현,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소설가 김남일이다. 김남일 제공
1995년에 처음 베트남을 갔다 온 나는 동료들과 함께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그를 소설가 최인석 형에 이어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리영희 교수를 초청해 베트남 전쟁의 진실에 관해 들었던 강연이 기억나는데, 아마 그가 회장으로 있을 때 마련한 자리였을 것이다.
실천문학사 이야기를 해야 한다. 웅진출판사 시절부터 탁월한 기획 능력으로 출판가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영현은 송기원 선배가 주식회사 체제로 다시 꾸린 ㈜실천문학사의 대표로서도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서울의 종잇값을 올리는 데 크게 한몫한 ‘체 게바라 평전’을 비롯해서 박완서의 ‘오래된 농담’,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모두 그가 대표로 있으면서 펴낸 베스트셀러 목록들이다.
‘베트남 이해하려는 작가’ 회장 맡고 실천문학사 대표로 경영능력도 탁월 연변 작가 김학철 문학비 세우는 등 사람들과 일 벌이던 ‘퍽 허술한 사람’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끝내 한 다리를 잃은 연변 거주 동포 소설가 김학철을 기억하는 문학비를 중국 현지에 세운 것도 그에게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 시절, 그는 참으로 부지런히 사람들과 어울리고 신이 나서 과하다 싶을 만큼 이 일 저 일을 벌였는데, 그러다가 덜컥 어떤 춘사에 휘말린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그런 상처 역시 숨은 병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해도, 새삼 누구를 원망하고 어떤 시절을 한탄할 것인가.
바라건대, 편히 명목하시길!
김남일 소설가
1994년 중국 서부 지역 여행 중 찍은 사진들. 우루무치 시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소설가 김영현(오른쪽에서 둘째)과 김남일(왼쪽에서 둘째). 가운데는 시인 이은봉이다.(아래) 김남일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