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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기자]
가정의 달 5월,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는 큰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의 내레이션 한 대목이 실렸다.
"아빠의 겨울에 나는 녹음이 되었다.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중
아낌없는 사랑과 눈물겨운 헌신을 바치는 부모, 그 부모 상가대출이자 의 사랑을 "다 먹고" 자라는 자식의 관계가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그 진하고 따숩던 드라마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연애편지 쓰듯 했다. 한 자 한 자 배려하고 공들였다. 남은 한 번만 잘해줘도 세상에 없는 은인이 된다. 그런데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는 낙서장 창원 아파트 전세 대하듯 했다.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고 튀어나왔다.
- <폭싹 속았수다> 8화 중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처럼, 이러니저러니 해도 받아주리라 믿는 이에게 우리의 말과 마음은 자주 뾰족뾰족하고 삐뚤삐뚤한 채 튀어나온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서는 기어이 용인될 것이라 마이너스대출 한도 는 듯. 주로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렇다. 나도 그랬다.
요즘엔 엄마가 유독 생각나 운전을 하다가도 괜히 "엄마" 불러본다. 늦겨울에 1주기를 보내고 봄꽃이 하나둘 피는 계절이 되니 또 짙어진 그리움이다. 제법 눈부시고, 제법 따스해진 햇살 아래 노랗게, 빨갛게, 하얗게 소복이 자라나 반짝이는 봄꽃들을 보니 엄마가 생각났 이삿짐센터 다, 하고 말하려니 죄책감이 불쑥 솟는다. 고르지 않은 말과 마음이 아무렇게나, 다정한 구석 하나 없이 까끌까끌하기만 한 채로 내뱉던 기억이 한 자루는 되니 그렇다.
친밀한(?) 엄마와 딸
엄마와 나를 생각하면 사랑만 가득했던 건 아니고 애증이 공존했다고나 할까. 엄마 생각을 하다 보면 '애증'이라는 대출이자계산방법 말과 함께 자연히 떠오르는 책이 있다. 2016년에 사노 요코의 <시즈코 상>이라는 책의 마무리를 맡았는데, 어쩌다 보니 표지의 캘리그래피 작업까지 해서 더 각별해진 책이다.
▲ 사노 요코 <시즈코 상>?2016년에 출간된 한국어판이다.
ⓒ 조경국
시즈코 상, 우리말로 하면 시즈코 씨. 엄마 이야기를 해놓고 누구 '씨'라고 참 건조하게도 제목을 붙였다 싶었다. 우리 엄마 이야기였다면, '진화 씨'인가. 한국에서는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출판사, 2010), <시즈코 상>(펄북스, 2016), <시즈코 상>(아름드리미디어, 2024)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출간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2016년 펄북스에서 출간이 될 때 일본 저작권사의 조건이 '시즈코 상' 그대로, 한 글자도 제목을 바꾸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는데 한국어판 저작권사가 바뀌었는데도 제목은 그대로인 것을 보니 그 조건이 그대로인가 싶다.
<시즈코 상>은 일본의 유명 그림책 작가이자 한국에선 에세이스트로도 잘 알려진 故 사노 요코가 일흔의 나이 때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쓴 자전적 에세이다.
나는 내 반평생 동안 줄곧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특별히 친밀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를 싫어하는 딸은 나뿐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은 옛날이야기 속의 심술쟁이 할아버지가 파냈던 잡동사니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 사노 요코, <시즈코 상> 중
엄마와 나는 특별히 친밀했던가? 친밀했다. 친밀했지만 또 싫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애(愛)'와 '증(憎)'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고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솟구쳤다 사라졌다 하는 보통의 것이었다.
깔깔거리며 품을 파고드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스트레스로 머리끝까지 하얘지는 순간도 있는. 그래서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는 사노 요코의 말에 왠지 모르게 안심(?)하며 위안을 얻었나 보다.
여자, 사람 그리고 엄마
한두 해 나이를 먹어 40대가 되고 50대에 이르니 무뚝뚝했던 엄마는 점점 동지가 되고 친구가 되었다.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부모님'이라는 말처럼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안 듣고 싶은 말이나 안 들어도 될 것 같은 이야기까지 자연스레 건네지는 사이가 되더라는 의미다.
가령, 아빠에 관한 끝없는 불평이라든가, 나와는 하등 상관없을 것 같은 동네 아줌마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같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한탄이나 섭섭함, 엄마 세대의 일상다반사를 듣는 일은 아직 철이 덜 든 딸에게는 성가실 때가 많았다. 아니 성가시다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 정도 이야기에도 비혼의 나이 든 딸은 무던히 응대하지 못했다. 무조건 맞장구만 쳤어도 그만일 것을, 매번 그건 그렇고 저건 저렇다며 또박또박 재단하고 기어이 입바른 소리랍시고 엄마의 억장이 무너질 말을 어리석게 휘두르곤 했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시즈코 상>에서 사노 요코는 당연히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못한 죄책감에 관해 말한다. 살그머니 엄마 손을 찾던 어린 딸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고,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던 냉정했던 엄마의 기억으로 모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지라 사노 요코는 그런 엄마가 나이 들고 치매가 오자 실버타운에 모셨나 보다.
실버타운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늘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 옛날 노파를 버려두었던 산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내 노후를 위해서 모아둔 돈을 깡그리 쏟아붓고 매달 내 생활비보다도 많은 돈을 지불하는, 어처구니없는 돈이 드는 산. 그렇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엄마를 증오해 온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사노 요코, <시즈코 상> 중
나는 사노 요코처럼 '충분한' 돈이 없어 내 시간과 마음을 최대한 지키면서도 미안함이나 죄책감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덜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조금의 돈과 조금의 노동력과 조금의 마음과 조금의 시간. 모두 '조금'이었다는 것이 지금의 그리움에 죄책감과 미안함이 더 많이 얹히게 된 이유다.
이런 그리움마저 '내 마음'을 위한 것
엄마가 계실 때도 그랬지만, 나는 내 부모님이 노년의 시간을 외롭지 않고 평화롭게, 좀 '알아서' 잘 보내셨으면 하는 영악한 마음이 있었다. 오로지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 너무나 당연히 부모가 단단하고, 씩씩하고, 감히 견줄 수 없는 지혜를 가진 굳건한 태산 같은 존재이기를 소원했다(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렇게 태산처럼 무너지지 않고 계셔야 내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불효녀 같다는 느낌은 싫어요, 하는 그런 영악한 마음이었으니 부모를 위한 것은 아니고,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또는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그런 죄책감과 후회를 짊어지고 살 것이 자식의 숙명일까. 아침저녁으로 '엄마' 하고 부르며 후회와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또 현재와 미래의 죄책감과 후회를 쌓고 있다.
이제 더는 어리석지 말자는, 더는 그리움에 죄책감을 더하지 말자는, 이런 내 마음 편해지려는 꿍꿍이를 갖고 늙은 아버지 앞에 서지만, 이번에도 매번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고" 내뱉는 자식이 된다. 그래서 또 운전대를 잡고는 혼잣말한다. "엄마, 나 참 어리석지, 골때리지."
▲ 봄꽃?동네 산책 중 소복이 자라난 봄꽃을 보았다.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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