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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석 주연의 영화 <피그 빌리지>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얘기이다. 마이클 루커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그러나 일부 로케이션 분량을 빼고는 장면들이 대부분 한국 인천의 한 세트장에 와서 촬영된다. 로케이션 컷 등도 상당 부분 CG로 처리된다. 영어 대사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미국 및 해외시장 개봉을 목표로 한다. 각본(차우진) 감독(이상용) 제작(마동석) 등 주요 스텝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국 영화지만 미국 영화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게 목적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 시장을 겨냥해 한국 세트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기발한 전략에 속한다.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글로 제2금융권이란 벌 OTT의 공세는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3억 달러 이상의 거대한 투자 배급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들. 월트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등을 말한다)의 구조에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파라마운트는 주가가 10%로 떨어져서 결국 준 메이저급에 불과했던 ‘스카이댄스 미디어’에 넘어가는 등 세력 판도가 농협저축은행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올해 할리우드에서 촬영되는 영화는 전년 대비 25%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할리우드의 고용상황이 매우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이며 한국 영화계처럼 비용 절감이 화두가 되고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영화 '피그 빌리지' 포스터. / 이미 주부개인급전 지 출처. ⓒ IMDb
OEM 제작 환경 만들어야
같은 영화를 촬영하는 데 있어 한국에서의 제작비는 할리우드의 20% 수준이다. 예컨대 할리우드에서 2억 달러(2천800억 원)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한국에서라면 500억 원 정도에 만들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편수의 감소는 역설적 LTV DTI 규제완화 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세계적 인지도의 스타 감독들, 인적 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문제는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재산권)이다.
<어벤져스>나 <블랙 팬서>처럼 일부 장면을 한국에서 촬영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숏 인 코리아(장면 대부분을 한국에서 찍는 것)’ 한국신용정보주식회사 영화나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비용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캐나다 배우 애나 캐스카트 등이 나오는 시즌 드라마 <엑스오, 키티>나 아마존 프라임의 6부작 드라마 <버터플라이>가 그런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로 인해 한국에서의 스텝 고용 효과는 상당히 올라간다. 그러나 이들 모두 결국 미국산 작품들이며 미국 ‘소유’의 콘텐츠들이다. 이런 작품들에 대해 이제부터는 ‘차근차근’ 한국의 IP 지분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先)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국제 공동제작 펀드 조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결국 돈이다. 정부가 돈을 붓고 민간 자본이 ‘매칭’을 통해 비교적 ‘큰 자금’을 만들어 이런 종류의 영화에 투자하는 것, 더 나아가 제작에 참여하거나 아예 제작 자체를 주도하게 하는 산업 환경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할리우드 영화의 OEM 제작(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도 유치하고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메이드 인 코리아’ 방식의 제작도 키워야 한다. 할 일이 산더미이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더 홀>은 그 두 측면, 곧 OEM과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측면에서 선구적인 예이다. 이 영화에는 할리우드 배우 테오 제임스를 캐스팅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 자본 2000만 달러(약 280억)가 투자됐다. 미국으로서는 저예산 영화지만 한국으로서는 빅 버짓(Big budget) 영화이다. <더 홀> 역시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다. 주인공 역의 테오 제임스 외에는 염혜란, 정호연 등 한국 배우가 출연한다. 제작진 모두가 한국인이다. 결국 한국 영화지만 사실상 미국 영화이다. 한국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교통사고로 한국인 아내를 잃고 한국인 장모에게 숨겨져 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물이다.
세계 아시아인들을 위한 공진화
이처럼 할리우드를 공략하는 것과 동시에 아세안(ASEAN,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주요 10개국)형 콘텐츠를 만들어 세계에 흩어져 사는 아시아인들을 겨냥하는 시장 확대 전략을 추진해 나가는 것도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미디어 연구자들의 잇단 제안이 주목받고 있다. 조영신(『애프터 넷플릭스』 저자), 고삼석(『넥스트 한류』 저자) 등이 내세우는 이른바 ‘공진화 전략’이다.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 원 플러스 원이 새로운 원을 만들며 진화한다는 의미)는 말 그대로 한류 영화와 드라마들이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하는 콘텐츠 수출을 넘어 아시아적 가치나 요소를 담아냄으로써 아시아 콘텐츠 자체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지속가능한 한류’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 베트남에서 개봉된 한국 주도의 베트남 영화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가 모범적인 사례이다. 이 영화는 지난 8월 1일 베트남에서 개봉돼 상영 3일 만에 80여만 관객을 모았다. 제작비 BEP는 10억 원 초반대였으며 이미 순수익을 넘어선 상황이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한국에 있는 베트남인 아빠가 고국에 있는 다른 형에게 ‘버리러’ 간다는, 일종의 한국식 고려장 풍습을 변형한 가족 영화이다. 한국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주연인 엄마와 아들 역이 모두 베트남 배우이다. 한국 배우 정일우는 조연이지만 캐스팅 티켓 파워를 이끌었다.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는 한국 제작자와 한국 감독이 만들었으나 베트남 관객에게는 한국 요소가 일부 있는 완벽한 베트남 영화로 인식되고 있다. 평균 연령이 젊고 인구 1억200만 명에 육박하는, 세계 인구 16위인 베트남 영화시장은 현재 매해 1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영화산업의 측면에서 전형적인 이머징 마켓(신흥시장)의 국가이다.
영화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 베트남 포스터. / 이미지 출처. ⓒ IMDb
한국 영화가 아세안 국가와 국제 공동제작을 통해 범아시아 스토리를 발굴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려는 데에는 가성비도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 요소를 차지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의 제작비가 20% 수준이라면 한국 영화에 비해 아세안 영화의 제작비는 20% 수준이다. 이건 놓칠 수 없는 비용 절감 효과이다. 저렴한 예산으로 시장을 넓히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위해 한국 내부에는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의식적,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있다. 아시아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을 소멸시켜야 하며 지나치게 미국과 서구로 기운 문화 사대주의적 태도를 재고해야 한다.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세계동포주의에 입각한 문화 인식의 소양을 넓혀가야 한다. 문화는 먹을거리이다. 편향적인 문화 소비 행태로는 시장을 넓힐 수가 없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그것과 동시에 시간이 촉박한 문제이다. 이 딜레마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할 거버넌스(정부, 행정기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때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