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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었을까? 정진동은 30여 년간 활동해 온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 아니 충북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시집(?) 보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청주산선 자료를 기증한 것이다.
역사를 기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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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청주도시산업선교회 자료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는 신문기사
ⓒ 충청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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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출범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초대 이사장 박형규 목사)는 전국 민주화운동 자료의 총본산이었다. 한국사회를 민주화시킨 각 지역의 사료, 사진과 영상, 증언 등이 모두 모인 곳이다. 자료 모음 사업은 민주화운동 참가자들이 고령화되고 지역과 단체가 소장한 자료들이 유실(遺失)되면서 국가기관이 한국경제TV 주식
전문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에 기인했다.
충북 지역에서는 자료수집의 1차 대상이 당연히 청주도시산업선교회였다. 1973년부터 활동하면서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 정진동의 넝마주이, 신흥제분 투쟁, 1978년 노동자·농민 단식농성, 정법영 의문사, 1988년 택시 파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료 등이 총망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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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엄혹했던 1970, 1980년대 민주화운동 자료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관하고 있던 단체는 거의 없었다. 유신시대와 전두환 시대에 단체의 '자료'는 그 자체로 탄압의 빌미가 됐다. 그렇기에 기록물과 자료는 태워지기 일쑤였으며, 특히 사진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학생운동이 가장 심했으며, 노동·농민운동 분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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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외적인 곳이 도시산업선교회였다. 각 지역의 도시산업선교회가 독일을 포함한 외국의 지원을 받은 종교단체이었기에 정권과 정보기관이 함부로 압수수색을 하지 못한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보다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사건에 관한 기록과 관리를 어느 활동 못지 않게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2004년 10월 11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고 인쇄된 종이박스 30여 개가 쌓여 있었다. 30여 년간 활동해 온 1천여 건의 사료를 담은 상자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정진동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강희남 목사는 정진동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1960, 1970년대 WCC(세계교회협의회) 지원으로 전국의 대도시에 만들어진 도시산업선교회는 2004년 당시 영등포와 청주 두 곳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2004.10.16. <충청리뷰>).
마지막 연설
▲ 마지막 연설?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조합 인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연설하는 정진동
ⓒ 청주기별 양진걸 기자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2004년 12월 29일 청주시 향정동 하이닉스·매그나칩 앞에는 청주지역 1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였다. 불과 나흘 전인 성탄절 새벽에 하이닉스·매그나칩이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직장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외국인노동자인권복지회, 일하는 사람들,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에 정진동이 마이크를 들었다.
"10년 안팎으로 일한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해고한다는 것이 기업윤리입니까?"
정진동은 노동조합을 이유로 직장을 폐쇄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이날 16개 시민사회단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을 위해 연대하겠다고 밝혔다(2004.12.29. <청주기별>).
정진동의 생전 마지막 연설이 된 이 날의 발언은 기자회견에 참석한 200여 노동자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 평소에는 툭하면 "노사가 한 가족처럼~" 이라고 외치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노동자들을 헌신짝 내버리듯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면식도 없는 정진동 목사가 "노동자가 우리 사회의 주역"임을 역설하자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울컥했다. 직장폐쇄 4일째, 세상에 자기들 편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차에 정진동의 말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때부터 30개월 동안 지역의 최대 이슈로 등장한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 하청 싸움은 '고난' 그 자체였다.
하이닉스와 매그나칩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2004년 10월 22일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사측은 그해 성탄절 새벽에 직장폐쇄를 하며 12월 31일 240명 노동자를 전원 해고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노동조합 인정, 단체교섭에 성실히 임할 것, 정규직화였다. 결코 무리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요구는 30개월 동안 노동자의 피를 말렸다.
오열
하이닉스·매그나칩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정진동에게 운명의 그림자가 다가온 것은 사흘 후인 2005년 1월 1일이었다. 그날은 셋째아들 정세영이 이사하는 날이었다. 정진동의 아내 조정숙은 아들 이사를 돕기 위해 집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침 8시에 정진동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를 부축해 병원으로 갈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진동이 119 앰뷸런스를 부를 상태가 아니었다. 쓰러진 정진동을 조정숙이 발견한 것은 세영의 이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온 오후 3시께였다.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골든타임은 보통 30분이기 때문이다.
충북대병원으로 긴급히 후송됐지만 하필 그날이 국경일이라 바로 치료받을 수 없었다. 다음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 가장 먼저 찾아온 이는 김재수였다. 당시 김재수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이자 우진교통 대표이사였다. 김재수는 정진동의 팔을 잡고 "목사님~" 하며 오열했다. 말을 할 수 없었던 정진동은 눈물만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수술 여부는 일주일간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담당 의사의 이야기에 가족들은 초긴장 상태로 일주일을 보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면회객들이 줄을 이었다. 백기완은 충북대 철학과 유초하 교수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정 목사 힘내세요. 얼릉 일어나 씩씩하게 일해야지" 백기완의 격려에 정진동은 밝게 미소를 지었다.
보건복지부장관 김근태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병실 문을 열었다. "목사님!" 하며 그는 정진동의 손을 쥐었다. 1985년 9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으로 구속돼 경기도 경찰국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22일간 지옥의 고문을 당한 그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을 앓던 김근태는 병마와의 싸움이 얼마나 큰 고통인 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정진동이 쓰러진 것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다.
입원한 지 3개월 만에 정진동은 청주성모병원으로 이송됐다. 잠시 상태가 호전됐을 때 정진동은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하거나 외출을 하기도 했다.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캠코더를 들고 병실을 찾았다. "목사님 응원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이닉스 노동자 힘내라!" 노동자들의 요청에 정진동은 어눌하지만 분명하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숱한 면회객 중에 정진동을 기쁘게 했던 이는 조병환과 그의 딸 조아라였다. 1988년 택시 파업 때 조병환이 딸 아라를 목마를 태워 시내 행진한 것을 인상 깊게 보았던 터였다.
"목사님. 회복되시면 이제는 편히 쉬세요." "퇴원하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할 거야." 조순형의 말에 정진동의 대꾸였다. 평생을 노동자·민중을 위해 살아온 정진동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자신이 병마와 싸우다 보니 장애인들의 고난이 무엇보다 크게 보였던 것이다.
정진동의 마지막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2007년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그해 12월 10일 오후 5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 운구?청주시청에서 상당공원으로 운구하는 모습
ⓒ 충북인뉴스
사회장
정진동이 눈을 감은 다음 날 '고 정진동 목사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애도식을 개최했다. 장례위원회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때 탄압으로 감옥을 마다하지 않고 넝마주이를 하며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었다"며 "병상에 누워서도 '나에게는 아직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다'며 당신의 할 일을 찾았던 분"이라고 추모했다(2007.12.11. <충청타임즈>).
후일 통일부장관과 경기도지사를 하게 되는 이재정이 참석한 가운데 발인식(발인 예배)을 치렀다. 정진동의 시신은 청주시청에서 꽃상여에 태워졌다. 청주시청에서 상당공원까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회원 박창우, 한천동, 최만수, 한구현과 우진교통 노동조합 간부들이 상여를 맸다. 조문객들이 영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뒤를 따랐다.
상여가 상당공원에 도착하자 장례식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비통한 마음을 부여안고 머리를 숙였다. 300여 명의 청주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중의 벗 정진동 민주사회장'이 열렸다. 첫 순서로 노무현 정부로부터 정진동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전통제례 의식의 첫 순서인 초헌(初獻)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회원 박창우가 맡았다. 비통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던 백기완의 추모시 낭독 순서였다. 백발을 날리며 앞으로 나선 백기완은 짧지만 인상적인 추모시를 낭독했다.
아주 가시는 게 아니라면서요 / 앞장서 가실뿐
못 올 길 가시는 게 아니라면서요 / 이 물로 앞서 가실뿐
아, 캄캄한 한낮일수록 / 온몸 불꽃 위에 무너뜨리고
모두가 입을 다물 때 / 온몸으로 앞길을 가르키시던(가리키시던)
영원한 스승, 우리의 벗이여!(백기완의 추모시 전문)
'민들레의 노래' 팀이 추모가를 부르고 도종환 시인이 추모사를 했다. 도종환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정진동을 그리워하는 추모사를 했다.
▲ 눈물?추모식에서 도종환의 눈물
ⓒ 충북인뉴스
"정 목사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정 목사님과 함께 견뎌온 시대는 저도. 우리 모두도 고통스럽던 시대였습니다. 정 목사님과 함께 계획하는 일은 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정 목사님은 멈추는 적이 없었습니다."
도종환은 19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 때의 고난을 상기하는 듯했다. 도종환은 정진동이 쓰러진 후 나태해진 우리들의 삶을 질책했다.
"우리의 일은 지난 시대처럼 고통스럽지 않고, 우리가 진 짐도 지난 시절처럼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때처럼 온몸을 다 던져 일하지 않고, 생애를 다 던져 싸우지 않고 있습니다."
도종환의 추모사는 정진동의 안식을 기원하며 마무리됐다. 추모사를 마친 도종환에게 조순형이 다가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종환과 조순형은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꽃상여?상당공원으로 꽃상여가 들어오는 모습
ⓒ 충북인뉴스
사회장의 마지막 순서는 '예술공장의 두레'의 진혼무였다. 망자(亡者)가 거듭 태어나서 좋은 곳으로 가라는 길닦음 의식인 '베 가르기'와 쑥향을 피워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좋은 기운을 모아서 평안한 곳으로 가라는 의미의 '쑥대 춤'을 췄다.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인 정진동의 시신은 광주 망월동 묘지를 향했다. 망월동에 도착한 일행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운구를 담당한 우진교통 노동조합 간부들이 첫발을 떼었을 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장중하게 울렸다. 이 노래를 뒤로하고 충북민주화운동의 큰 별 정진동은 역사에 영원히 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