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제주 4·3, 제주 해녀항일운동 등을 작품으로 그려온 김홍모 작가가 라니아 술탄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 김홍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가자전쟁 발발 2주년이 된지 이틀 뒤인 지난 9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 인질의 주검 반환과 하마스의 무장 해제를 두고 갈등을 빚는 가운데 2단계 물밑 협상이 진행되는 위태한 휴전이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는 사단법인 아디(ADI)와 팔레스타인여성위원회연합(UPWC)의 도움을 받아 전쟁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차례로 싣 는다.

저는 라니아 술탄(50)입니다. 1975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북부 바이트라히야에서 태어났어요. 저의 선조들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입니다. 제가 자란 곳은 바다와 가까운 어부와 농부들의 작은 마을이었어요. 아버지는 오렌지를 파는 상인이셨죠. 하지만 이스라엘 정착 민들이 일대의 오렌지 나무들을 뽑아버려서, 부모님들은 밭에서 야채를 키워 팔아 10남매를 기르셔야 했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인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피난을 가셨어요. 유대인들은 만나는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였어요. 저희 친척 중에도 순교자가 많았죠.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삼촌에게 땅을 파도록 한 뒤에 그 구덩이에 들어가게 하고는 총으로 쏴 죽였어요. 아버지는 팔레스타인 해방군에 가담하셨죠. 아버지가 살아남으신 건 기적이었어요.



라니아 술탄. 라니아 술탄 제공


11살이었을 때 ‘1948년의 땅’으로 여행 을 갔던 기억이 나요. 하이파, 나사렛, 서예루살렘 같은 ‘나크바’ 이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요(나크바는 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으로,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 주민 75만명이 고향에서 쫓겨난 사건을 말함). 멋진 곳들이었지만, 그 기억마저 이스라엘 점령군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하며 느꼈던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어요.
제가 12살이던 1987년 첫번째 인티파다(민중 봉기)가 일어났어요. 점령군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인 우리한테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쐈어요. 저도 돌을 던졌어요. 제 한 형제는 점령군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저녁 8시면 통행이 금지됐어요. 사람들이 돌아다니다 걸려 구타를 당하고 심지어 죽기도 했어요. 점령군들은 우리 집에도 쳐들어와서 집을 수색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픽 한겨레


2000년 두번째 인티파다 때는 아이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갑절로 두려웠어요. 집주변이 폭격을 받아서 집을 나설 수가 없었어요.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한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잘 못 갔어요.
어렸을 때는 커서 언론인이 되고 싶었어요. 세계적인 방송사의 기자가 돼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죠. 하지만 전 16살에 결혼하게 돼서 학교를 떠났어요.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낳았죠. 이제 31살, 29살 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손주들도 낳았어요. 농업환경공학을 전공한 27살 아들 오마르는 가자시티에 있는 이슬라믹대학에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죠. 셋째 딸(20살)은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는 중이었고, 막내딸(17)은 고교생이었어요



라니아 술탄(왼쪽 두번째)과 가족들. 라니아 술탄 제공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학업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학교를 떠난지 14년만에 학교로 돌아갔어요. 바이트라히야에 있는 쿠드스 개방대학교 분교에 입학했는데, 학교를 정기적으로 갈 수 없어서 열심히 노력해야 했죠. 기초교육 전공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을 때는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어요.
38살부턴 ‘팔레스타인 여성위원회 연합’(UPWC) 소속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가자지구 북부에서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을 증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을 섬기고, 여성들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죠.
하지만 이런 저의 삶과 아이들의 꿈은 2023년 가자전쟁으로 파괴됐어요. 앞뜰에 구아바나무가 있던 아름다운 제 가족의 2층짜리 집은 완전히 부서져 버렸어요. 학교가 파괴돼 아이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죠. 저를 포함한 술탄 가문의 친족 860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도 폭격이 가해져 완전히 파괴됐어요.



라니아 술탄(가운데)과 그의 아들(왼쪽), 남편(오른쪽). 라니아 술탄 제공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은 제 가족과 친척들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일입니다. 지난 5월16일 자정이 막 넘었을 때, 제 삼촌(91)의 집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삼촌을 포함해 사촌 이흐산(49), 그의 아내 노하(45), 조카 마지드(27)·모하메드(22)·림(16)·바하(15)까지 일가족 7명이 모두 죽었어요. 다음날에는 사촌 리야드(35)와 나세르(22)가 삼촌 가족의 주검을 수습하려고 갔다가 공습으로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제 자매의 집도 공습을 받았어요.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이스라엘군 무인기가 한동안 주변을 낮게 날며 폭격을 계속해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구조대도 대원이 희생될 위험이 있다며 출동하지 못했어요. 다행히 동생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동생의 사위는 많이 다쳐서 회복하는데 오래 걸렸어요.



라니아 술탄이 살던 집. 라니아 술탄 제공


2023년 10월7일 전쟁이 발발하고 5일 뒤에 제 가족은 바이트라히야를 떠났습니다. 북부 가자시티를 거쳐서, 중부 누사이라트에 있는 학교에 만들어진 난민 캠프로 갔어요. 다음해 1월에 중부 다이르알발라흐로 가서 1년 넘게 지내다, 60일 휴전으로 바이트라히야에 돌아왔어요. 다시 3개월 뒤인 지난 5월에 가자시티로 피난을 떠났어요. 지난달부터 이스라엘군은 가자시티에 남아 있으면 죽게 될 것이니 피난을 떠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렸어요. 결국 9월16일 다시 다이르알발라흐로 옮겨왔어요.
지난 2년간 6곳의 피난캠프를 옮겨다녔지만, 쉽고 편했던 적은 없어요. 이번에 다이르알발라흐로 옮겨 올 땐 이동수단을 구하는 것부터 너무 어려웠어요. 제 가족 7명은 400달러를 내고 차를 타고 올 수 있었어요. 옷과 이불처럼 정말 생활에 필요한 것만 실어야 했죠. 첫째딸 쇼루크(31)의 가족은 3일이나 기다린 뒤에야 500달러를 내고 운전사가 있는 툭툭(삼륜차)을 타고올 수 있었어요. 둘째딸 히바(29)는 이동수단을 구하지 못해 남편과 5살과 2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 캠프로 12㎞를 걸어와야 했어요.
다이르알발라흐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집세가 로켓처럼 치솟아 올랐어요. 텐트를 사려면 1천달러를 내야 하고, 땅값도 따로 내야 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워요. 이스라엘군은 텐트가 가자지구로 들어오는 걸 방해해요. 그래서 구호단체에서 나눠준 텐트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픽 한겨레


대신 월 500달러에 한 칸짜리 방을 빌렸어요. 저희 방에는 문이 없어요. 화장실엔 창문이 없고요. 물도 나오지 않아요. 같은 집의 다른 방은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어요. 제가족 5명이 매트리스도 없는 곳에서 자야 해요. 그래도 방을 구한 것 자체가 운이 좋은 거에요. 제 딸들이 죽은 사촌들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도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모습은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특히 여기서 물을 구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우물을 대부분 파괴했어요. 구호기관에서 물을 나눠주지만,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엔 너무 부족해요.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물을 사올 수 밖에 없습니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도 부담스러운 정도에요.
지난달 이스라엘과 휴전을 했지만, 저는 다이르알발라흐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제 고향으로 갈 수는 있게 됐지만, 도로가 잔해로 막혀 있어서 갈 수가 없어요. 제 고향은 이제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길이 뚫리면 고향으로 돌아가 무너진 제 집 터에 천막을 치고서 살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라니아 술탄의 집터와 고향 마을. 라니아 술탄 제공


희생당한 친척들, 죽어간 수많은 아이들은 가깝게든 멀게든 하마스와 아무 관련이 없었어요. 그들은 우리처럼 살기 위해 도망치던 무고한 사람들이었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당신과 똑같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굶주림, 쫓겨날 것을 걱정하지 않고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 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과 똑같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입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아이들이 죽지 않고 존엄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한국 정부에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고, 이 끔찍한 학살의 책임을 묻고,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력히 요구하는 실질적인 조처를 취해주길 바랍니다.
한국 시민들에게 요청합니다.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서도 죽임당하고 쫓겨나는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대해주세요. 당신들의 연대가 이 극도로 힘든 상황을 견뎌낼 희망을 줍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그림 김홍모 기자 admin@gamemo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