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국군 민간인 집단 학살 자행 경로수백명 억울한 원혼 가슴 아픈 이야기 품어가야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 한 맺힌 돌무덤쌍재·고동재 고갯마루 걸음걸음 ‘희비애환’
방곡마을 초입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6·25전쟁 때 가현·방곡·점촌마을과 함양 유림면 서주리 강변에서 국군에 의해 이른바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희생됐던 양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묘역지. 이유도 모르고 죽었던 억울한 원혼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방곡마을 초입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6·25전쟁 때 가현·방곡·점촌마을과 함양 유림면 서주리 강변에서 국
군에 의해 이른바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희생됐던 양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묘역지. 이유도 모르고 죽었던 억울한 원혼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지리산둘레길 제5구간은 70여 년 전 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던 경로를 역방향으로 거쳐
가는 노정이다. 특히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산청군 금서면 방곡마을 그리고 고동재에서 수철까지의 둘레길은 당시 국군의 경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무튼 방곡저수지가 끝나는 방곡마을 초입에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6·25전쟁 때 가현·방곡·점촌마을 그리고 함양 유림면 서주리 강변에서 국군에 의해 학살됐
던 양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묘역지이다. 소위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던 만행과, 이유도 모르고 죽었던 억울한 원혼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1951년 2월 6일,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는 ‘작명 제5호’의 작전 수행을 위해 수철리에서 야영을 하게 되는데, 그날이 바로 설날이었다. ‘작명 제5호’란 산청·함양·거창의 작전지역 내의 잔적을 섬멸하는 것으로 공비와 내통할 수 있는 산간 마을을 깨끗이 비우고 주민들까지도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2월 7일 새벽, 군인들은 고동재를 넘어 가현마을에 도착한 후, 주민 전원을 마을 뒷산에 모아 놓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여기서 학살된 주민은 123명이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8명 정도였다. ‘작명 제5호’의 첫 번째 작전 수행이었으며, 그것은 어떠한 설명도 이유도 없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학살만 있었다. 그들은 마을 전체를 불 지르고는 가축들을 몰고 방곡마을로 향했다. 방곡마을에서도 가현마을에서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마을에 불을 지르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곳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이 212명이었으며, 점촌마을 역시 60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순식간에 3개 마을이 불타고 395명이 숨졌다.
같은 날,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강변 둔치에서는 같은 대대의 본부 중대 지휘로 아침부터 유림면 손곡리 주민들과 강 건너편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자혜리의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심문했다. 심문 내용은 군·경 가족 여부 등이었고 특별한 기준 없이 자기네들의 기분대로 분류했다. 오후 가현·방곡·점촌마을을 거친 2개 중대가 도착하자 사살 대상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커다랗게 파놓은 구덩이에 밀어 넣고 수류탄을 까 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에서도 310명의 양민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 1951년 2월 7일, 불과 10시간 동안 군인들의 집단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양민이 705명이었다. 이들은 이틀 후 거창 신원으로 가서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3일 동안 양민 719명을 학살했다.
1951년 2월 7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705명의 줄초상은 망자를 향한 애틋한 곡소리마저 없는 무심의 침묵으로 주검을 덮었다. 죽음을 슬퍼해야 할 자도 남겨지지 않은 망연한 침묵이었다. 정월 초하루 설날은 이들의 제삿날이지만 제사상을 받을 수 있는 원혼은 오히려 호사스럽다.
방곡저수지
방곡저수지
상사폭포
상사폭포
◇구형왕릉(仇衡王陵)
상사폭포를 지나 오르막 숲길을 거치면 쌍재의 임도를 만난다. 이 길에서 우측의 오름길을 따르면 쌍재를 향하는 지리산둘레길이고, 좌측의 내림길로 꺾으면 구형왕릉과 덕양전을 향하는 길이다.
구형왕릉은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덕양전은 구형왕과 그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구형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몇 줄이 있는 것이 전부인데, 그나마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이 상이하다. 그래서 역사보다 엇갈리는 전설들을 더 많이 달고 다니는 분이 구형왕이다.
덕양전
덕양전
삼국사기에서는 구형왕이 나라를 신라에 선양했다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침략에 대항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다고 각각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곳의 수정궁에 터를 잡은 것이 신라의 배려에 의한 것이 되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항복 후 이곳으로 피난 왔거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곳에 자리 잡고 후일을 도모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구형왕이 이곳 수정궁에 옮겨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와 신라와 끝까지 싸우다 이곳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아무튼 이곳의 돌무덤에 대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고 한 구형왕의 유언을 받들어 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포개 얹어 만든 능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구형왕릉은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기단식 총 7층의 석단으로 무덤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이다. 이를 석탑이라고 보는 반론도 있다. 구형왕릉에는 주변의 등나무와 칡넝쿨이 이곳으로 뻗어 들지 못하고, 이끼나 풀은 자라지 않으며, 새도 앉지 않고 잎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서 생을 다한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한이 서려서일까. 숙연해진다.
구형왕능
구형왕능
◇쌍재·고동재
제5구간은 동강에서 추모공원까지를 제외하고는 왕산의 허리를 감고 도는 산길이다. 그중에서도 쌍재와 고동재의 고갯길과 능선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왕봉에서 중봉·하봉·쑥밭재·외고개를 거쳐 (서)왕등재에 이르면 동쪽으로의 웅석봉 능선과 북동쪽으로의 왕산 능선이 갈라지게 되는데, 갈라진 왕산 방향의 지능선에서 만나는 고개가 고동재와 쌍재이다. 예로부터 고동재는 가현마을과 수철마을을 연결했고, 쌍재는 산청과 함양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 특히 쌍재는 산청과 함양을 오가는 장꾼들이 넘나들면서 한때는 주막들이 성시를 이루었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고동재
고동재
쌍재의 유래에 대해 왕산을 중심으로 바람재와 쌍으로 있다고 해 생긴 이름이라 하고, 고동재는 고개의 생김새가 고동 같다고 하거나, 옛날 가락국 군대가 고동을 불었다고 해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쌍재와 고동재의 고갯마루에는 희비 애환의 걸음걸음이 교차하면서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어온 수없이 많은 족흔(足痕)이 묻어 있다.
나라 잃은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과 왕군(王軍)의 한 서린 발자국이 이들 고개 어디쯤 파묻혀 있을 것이고, 망경대에 올라 잃어버린 고려 왕조를 그리워하다 쓸쓸히 내려오던 농은 민안부 선생의 충절 어린 발자국도 있을 것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학살하기 위해 군화 끈을 졸라매고 넘었던 고동재 어디쯤에도 이들의 살기 어린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을 것이다. 1951년 음력 설 이튿날 미명의 새벽, 미친 현대사의 족흔으로 남기게 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의 ‘작명 5호’ 작전은 고동재를 넘으면서 시작됐다.
황부호 작가
황부호 작가
글·사진= 황부호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