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시간이 망각과 자기 합리화를 향해 빠르게 흐르는 동안, 피해자의 시간은 과거 외상을 입었던 바로 그 순간에 멈춰 있다. /사진 셔터스톡



우리의 기억 체계는 각자의 생존을 위해 작동한다. 한쪽은 잊기 위해, 다른 한쪽은 잊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21세기 한국인은 ‘폭로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학교 폭력,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권력형 성범죄 등 묻혔던 상처가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다. 폭로의 순간은 한 번 본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보는 것 같다. 가해자는 부인한다. “기억나지 않는다.” 피해자는 심리적 쿨사이다릴게임 외상을 동반한 생생한 고통을 꺼내 보인다. 단순한 진실 공방을 넘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처절한 심리적 생존 싸움이 벌어진다. 2021년 스포츠계를 뒤흔든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학교 폭력 논란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초기에 ‘그런 일 없었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2019년 사회적 충격을 일으킨 ‘버닝썬 게이트’의 핵심 인물 정준영과 승리 역시 ‘사실무 사이다쿨 근’이라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배우 조진웅이 수차례 차량 연쇄 절도, 특수 강도 및 강간 등 중범죄 혐의로 소년원 송치된 사실이 논란이 됐고 방송인 박나래의 갑질과 불법 의료 논란, 국회의원 장경태의 성추행과 2차 가해 파문까지 모든 사건은 한 가지 본질을 공유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피해자는 자신의 과거 고통과 현재 존 오션릴게임 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



누구나 스스로는 선하고 유능하다고 믿어심리학자 캐롤 태브리스 등은 ‘인지 부조화 이론’을 통해 바다이야기무료 이를 심층적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선하고 합리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의 비윤리적 행동이 현재의 긍정적 자아상과 충돌할 때, 마음속에 심각한 심리적 균열이 생긴다. 이 고통스러운 부조화를 견디지 못한 가해자는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기억을 조작한다. 첫째, 기억을 희미하게 하거나 사건을 실제보다 축소한다 바다신릴게임 . 둘째, 사건 원인을 환경이나 피해자 탓으로 돌린다. 셋째, 자신의 행동을 불가피하거나 정당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자아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심리적 방어다. 가해자는 기억을 자신의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것이다.미국 하버드대 인지심리학자인 대니얼 샥터는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중 하나로 ‘편향’을 꼽는다. 편향은 현재의 감정과 믿음이 과거의 기억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재구성한다. 2019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과거 행동을 회상할 때 평균 37%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한다. 도덕적판단이 개입될수록 그 비율이 더 높았다. 가해자가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사실관계가 다르다’ ‘취지가 왜곡됐다’고 말할 때 그들은 이기적 편향 상태다. 자신의 선함을 믿고 싶기에 잘못을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는 믿음을 지키려고 자기 심리까지 조작한다는 뜻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도덕적 해리’가 작동한다. 비윤리적 행동을 저질렀으면서도 스스로를 도덕적이라 느끼게 하는 심리적 장치다. 반두라는 이를 여덟 가지 메커니즘으로 분류했다. 폭로 사건에서 가장 흔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책임 전가’를 들 수 있다. 가해자는 죄책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해자를 의심하고 사건을 축소한다. 오히려 피해자를 가해자라고 우기기도 한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망각, 자기 합리화 빠지는 가해자2020년 서울대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의 78%는 자기 행동보다 ‘상황적 요인’이나 ‘상대방의 유발’을 먼저 언급했다. 자기 의도나 성향을 먼저 인정한 경우는 12%에 불과했다. 때로는 역으로 고소·고발을 통해 자기 정당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가해자는 자신을 ‘억울하게 공격받은 사람’으로 재정의하고 피해자를 명예훼손의 가해자로 둔갑시켜 자아의 균열을 방어하려고 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 43%가 피해자를 역고소했다. 2023년 국민권익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 35.1%가 피해자에게 민형사상 조치를 취했다. 가해자의 시간이 망각과 자기 합리화를 향해 빠르게 흐르는 동안, 피해자의 시간은 과거 외상을 입었던 바로 그 순간에 멈춰 있다. 피해자가 폭로를 결심하는 이유는 과거 상처에 대한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그들에게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살아있는현재다. 정신의학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과거 사건이 현재 시제로 경험되는 상태’라고 말한다. 외상은 뇌의 시간 감각을 왜곡시킨다. 사건을 끝난 일이 아니라 계속되는 위협으로 인식하게 한다. 미국 국립정신보건연구소(NIMH)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는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합리성을 관장하는 전전두엽 피질의 기능이 현저히 감소한다. 위협을 감지하는 체계는 과잉 작동하지만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기능이 마비된다는 말이다.
배우 한진희씨는 “나를 배신한 여인에게 평생 나타나는 게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해서 TV탤런트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물며 더 큰 사건의 가해자가 성공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피해자는 또 한 번 상처를 입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종교적 회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스스로 해소하는 순간 피해자의 고통은 어떻게 되는가. 피해자의 싸움이 복수가 아니라 ‘정체성의 회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은 피해자에게 ‘나는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와 회복’에서 피해자가 겪는 가장 큰 상처를 ‘자아 감각의 파괴’라고 규정한다. 피해자의 폭로는 ‘나의 고통은 지금도 실재한다’는 사실을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가해자가 사건을 부인하거나 축소할 때마다 피해자는 다시 존재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이 과정을 쉽게 멈출 수 없는 것이다.누구 기억을 믿고 누구 고통을 인정할 것인가공인에게는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적용된다. 사회적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021년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국민 82%가 ‘공인의 과거 비위는 더 엄격히 다뤄야 한다’고 응답했다. 현대사회는 공인에게 능력뿐 아니라 도덕성을 함께 요구한다. 공인은 대중의 신뢰를 기반으로 명예와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따라서 사회는 이 인물이 과연 대중의 신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2024년 한 K-팝 아이돌이 학교 폭력 논란에 휩싸였을 때 소속사는 ‘피해자의 트라우마에 공감한다’고 발표했다.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을 ‘현재형 외상’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폭로의 시대는 두 개의 상반된 심리가 충돌하는 거대한 무대다. 가해자는 자아를 지키려고 자기 기억을 흐리기 위해 발악한다. 피해자는 현재 시제의 고통 속에서 존엄과 존재를 되찾으려 애태운다. 이 두 심리가 여론과 미디어의 장에서 맞부딪칠 때 우리는 진실에 대한 사회의 근본적 태도를 마주한다. 이렇게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한다. 그 충돌 속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누구의 기억을 믿고 누구의 고통을 인정하며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실은 어중간한 회색 지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억의 안개와 자기 합리화의 장막을 뚫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가해자가 명예와 경제력을 넘어 권력까지 갖는 사회가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가. 더구나 가해자가 고결하고 선한 척 ‘의인(義人) 코스프레’까지 하면서 각광받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폭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철저하고 공정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를 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어떤 공동체적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출발선에 서 있다. 우리는 모두 증인이자 심판관으로서 눈을 부릅뜨고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또한 오래오래 기억해야만 한다. 역사는 잊는 자에게는 되풀이되지만, 기억하는 자에게는 변화의 씨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