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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봄을 데려오는 계절. 눈 녹은 자리에 야생화가 채워지고 알파인 지대에 생명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봄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산으로 몰려든다. 걷기 위해서다. 알프스의 수많은 트레킹 루트 중에서 으뜸이라면 단연 투르 드 몽블랑TMB, Tour du mont blanc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세 나라를 이어주는 원형의 길. 서유럽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10m)을 가운데 두고 걷는다. 총 길이 약 160km, 해발 1,000~2,700m 사이를 오르내리며 걷는다. 여유롭게 일정을 잡는다면 7~11매도타이밍
일 정도 걸린다. 조급하면 놓치는 것이 많으니 넉넉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빠르게 걸으면 스쳐지나갈 기억들, 천천히 걷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풍경이 있다. 걷는 속도만큼 풍경과 감정도 달라진다.
첫 구간은 프랑스 샤모니chamonix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TMB 변형루트인 레우슈les Houches를 거쳐 콜데 보자col d골프존 주식
e voza, 트레라 테트tre la tete산장까지 구간을 소개한다.
산길 양옆으로 알프스 야생화가 한창이다. 꽃향에 온기가 더해져 코가 화끈해질 정도다.
지루할 틈 없는 코스
출발점은 샤모니 해외주식실시간
레우슈마을이다. 그곳에서 콜데 보자로 올라가는 데 산악기차나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트레일이 시작된다. 콜데 보자는 야생화 천국이다. 접근성이 좋고 풍경과 식생이 다양하다. 꽃으로 빼곡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숲속에서 제라늄이나 마르티곤 백합을, 초지에선 아르니카나 수선화나 알프스 용담을, 정상 부근에는 글로브 플라워, 알프톱텍 주식
스 양귀비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많은 고산 꽃들은 보호종이다.
콜데 보자의 명물 산악기차 몽블랑 트램웨이가 지나간다.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철도 노선 중 하나다. 기차길을 따라 서양 민들레가 가득하다. 콜데 보자에서 마실 물을 담는다. TMB 도중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마을 어귀, 통나무집인 샬레, 산장을 지황금성게임
날 때 물을 보충할 수 있다. 길을 따라 30분쯤 걷다 보면 비오나쎄Bionassay의 '지트Gite'에 닿는다. 지트는 프랑스식 농가 민박이다. 마치 고향집 마루에 앉아 먹는 저녁처럼 분위기가 따뜻하고 정겹다. 소박한 도미토리, 지역의 향이 담긴 식사, 그리고 여행자들의 이야기. 지트는 단순한 숙소가 아닌 '머무름' 그 자체다. 어떤 지트에서는 달콤한 크렘 브륄레가 식탁에 오른다. 불에 그슬린 설탕 껍질을 깨면 속에서 부드러운 풍경이 퍼져 나온다. 거절하기 힘든 맛, 지나칠 수 없는 온기다. 지트나 산장Refuge에서 숙식을 해결하면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다.
배낭에 장비를 넣고 야영을 하며 일주하는 트레커들.
지트를 지나 숲길을 타고 30분 정도 내려가다 보면 미아지산장Refuge de Miage(1,560m)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갈림길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표식을 보지 못하면 아래 마을까지 내려갈 수 있다. 일행이 많은 경우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이동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 미아지산장까지는 1시간 30분 걸린다. 오르내림이 완만하고 갈림길도 없어 길을 잃을 걱정이 적다. 콜데 보자부터 미아지산장까지는 4시간 정도 예상한다. 오늘 여정의 중간 지점인 미아지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앞 넓은 초원에 서면, 하얗게 빛나는 돔 데 미아지Dome de Miage 봉우리와 만년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건너 초원 너머로 삼삼오오 앉은 이들이 피크닉을 즐긴다. 방목 중인 말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손에 들고 있는 바게트 샌드위치 사이로 알프스의 햇살이 들어찬다. 미아지산장은 경치가 뛰어나고 접근이 쉬워 가족 단위의 트레커가 많이 찾는다. 앞장서는 비글 한 마리, 그 뒤를 따라가는 가족. 강아지는 매 걸음마다 옆을 살피고 꽃밭에 코를 묻는다. 그 작고 예민한 코가 담아가는 알프스의 향기는 어떤 걸까? 꽃, 흙, 사람, 그리고 여행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늘에 누워 휴식 중인 트레커. 시원한 바람이 책장을 넘겨 준다.
이 코스는 트레커에게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초원의 푸르름에서 만년설과 빙하, 깎아지른 암봉까지, 고도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야생화가 눈을 즐겁게 한다. 지역의 독특한 음식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아주 재미있다. 만나고, 인사를 건네고, 다시 멀어지는 사람들로 분주하기도 하다. 길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진다.
테이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이 보였다. 비비안이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워." 비비안이 말했다. 그녀는 앞에 앉은 남자를 가리키더니 "여긴 데미앙"이라고 말했다. 남자친구였다. 그녀의 옆에 앉은 12세 아이도 소개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날씨가 좋아 미아지산장까지 피크닉을 왔다고 했다. 비비안과는 샤모니에 있는 엔사ENSA 실내암장에서 함께 운동하며 알게 됐다. 그녀는 간호사였다. 그녀와는 웃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
몇 년전 나는 등반 중 사고가 나서 허벅지와 골반 안쪽이 부러졌다. 다행히 헬기로 구조되어 모르핀을 맞고 살랑쉬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됐다. 긴급 수술을 두 번하고 퇴원해 회복하고 있었다. 목발을 짚고 샤모니 시내를 지나가다 비비안을 만났다. 비비안이 내게 안부를 물었다.
"다친 데는 좀 어때? 3개월은 고생해야 될거야."
내가 대답했다.
"내가 다친 걸 어떻게 알았어?"
피크닉 온 비비안 가족. 산장에서 간단한 샐러드나 오믈렛 등 음식을 내주기도 한다.
"수술 명단을 적는 보드에 네 이름이 있더라. 설마하고 수술실에 들어 갔는데 네가 누워 있더라구."
"어. 네가 수술실에 있었다고? 맞아 간호사라구 했지. 살랑쉬 병원에서 일해?"
이런 우연이 있나. 수술실에 그녀가 있었다니. 수술하면서 나오는 출혈을 밖으로 빼기 위해서 치골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삽관해 놓았다.
삽관을 위해서 중요 부위에 면도해 놓았다. 전체를 하지 않고 필요한 왼쪽 부분으로 절반만 해놓았다. 우수꽝스러웠다. 의료인이긴 하지만 지인이 그 꼴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물론 헬기에서 정신을 잃고 수술이 다 끝난 후에 일어났으니 그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장을 뒤로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트레라 테트산장을 향해 걷는다. 야생화의 유혹에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다. 대부분 트레커들은 레콩타망les contamin으로 내려가지만 이번엔 산길을 더 걷는 쪽을 택했다. 산 속에서 더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30분쯤 걷다 보니 길가에 누운 이들이 보인다. 신발을 벗고 지도를 펼쳐 든 채,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는 듯하다. 걷는 이에게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멈추고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트뤽 산장Refuge du Truc은 해발 약 1,750m의 고원인 플라토 뒤 트뤽Plateau du Truc 에 위치한 소규모 산장이다. 수용인원은 28명이다.
걷는 속도만큼 마음이 정돈된다
7월에서 8월이 되면 해발 2,500m 이하는 눈이 거의 없다. 발목이 없는 가벼운 트레킹화만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다. 6월 전이나 9월 이후에는 잔설이나 신설이 있어 발목이 있는 등산화와 가벼운 아이젠을 챙기는 게 좋다. 반팔과 반바지로 걷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자외선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선크림을 수시로 덧바르며 걸어야 한다. 여름 유럽은 해가 길다. 밤 9시에도 날이 훤하지만 오후 4시 전에는 산장이나 숙영지에 도착하는 것을 지키자. 산속의 날씨는 언제든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 산장까지 두 시간을 예상하고 걸음을 옮긴다.
산장은 1936년부터 같은 가족이 운영하고 있으며, 신선한 우유와 프로마쥬 블랑fromage blanc 등 지역 특산물을 제공한다.
목초지 사이로 걷다 보면, 전기 목책 너머로 방목 중인 소들을 마주친다. 들려오는 방울 소리와 풀잎 흔들림이 어우러진다. 기온이 오르면 빙하가 녹아 계곡의 유속이 강해지고, 때로 길이 끊긴다. 이럴 땐 함께 걷는 이들이 서로를 지켜야 한다.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건넌다. 출발한 지 8시간 만에 산장에 도착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따뜻한 남풍과 맞부딪치며 소나기를 만들기도 했다. 산장 테라스에 앉아 신발을 벗고 숨을 고른다. 데이지 향이 스며든다. 거꾸로 선 달걀처럼 생긴 꽃이다. 한참 전부터 피기 시작했을 텐데, 아직도 향이 짙다. 마치 마음을 숨긴 채 곁에 있어 주는 사람처럼, 조용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전하는 향기다.
해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걷고, 보고, 멈추고, 다시 걷는 시간들이 고스란히 다리에 쌓였지만 몸은 오히려 가볍다.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발 아래 작은 꽃들도 여전히 묵묵히 피어 있다. 야생화의 향기, 동행자의 웃음, 지나친 이들의 인사, 바게트 속의 햇살 같은 작은 순간들이 얽혀 만든 하루였다.
트레킹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걷는 속도만큼 마음도 천천히 정돈된다. 빠르게 지나쳤다면 보지 못했을 작은 꽃, 멈춰 서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 함께 걷지 않았다면 나눌 수 없었을 말들. 오늘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밤이 되면 별이 밝아질 것이다. 도시에선 잊고 지냈던, 아주 오래된 빛. 그 아래서 잠들고, 다시 걷는 내일을 기다린다. 길은 매 순간 우리에게 다정했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계곡의 수량이 많아지고, 비가 많이 온 날은 다리가 유실되기도 한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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