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바일 독일 부총리 겸 재무장관(오른쪽)과 필리프 유스투스 구글 중부유럽 부사장이 11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구글의 유럽 투자를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제조업 쇠락 위기를 맞은 유럽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스스로 러시아의 값싼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끊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산업 기반이 흔들렸고, 특히 제조업 강국 독일은 전기료 폭등에 허덕이고 있다.
폭스바겐그룹은 수만 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고, 많은 독일 기업들이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트럼프 관세 때문만이 아니다. 에너지 비용과 활력 저하, 과도한 규제 중심의 산업정책이 맞물려 유럽 경제의 활력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빅테크들이 유럽 곳곳에 대규모 인공지능(AI) 투자를 추진하고 있 어 주목된다. 쇠퇴하던 유럽의 산업지도가 이들 투자로 재편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외신에 따르면 구글은 11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9년까지 독일 내 AI 기반 인프라에 55억유로(약 9조3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디첸바흐에 새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2023년에 문을 연 하나우 센터를 확장한다. 독일 에너지 기업 엔지(Engie)로부터 청정에너지를 공급받아 2026년까지 탄소 배출이 없는 에너지 비율을 85%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구글은 이번 투자가 독일 국내총생산(GDP)에 매년 10억 유로(약 1조7000억원) 이상 기여하고, 일자리 9000개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라르스 클링바일 독일 부총리는 "독일을 사업 거점으로 삼는 중요한 신호"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시네스에 100억달러(약 14조6000억원)를 들여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고 이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개발사 스타트캠퍼스, AI 인프라 플랫폼 엔스케일 등과 협력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포르투갈 을 유럽 내 '책임감 있고 확장 가능한 AI 개발 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대서양을 낀 포르투갈은 유럽·아프리카·미국을 잇는 해저케이블의 중심 허브로, 글로벌 AI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엔비디아 역시 독일 도이체텔레콤과 손잡고 10억유로를 투자, 세계 최초의 AI 산업단지를 뮌헨에 조성하기로 했다고 지난 4일 밝혔다. 또 AI 챗봇 '클로드'를 운영하는 앤스로픽은 프랑스 파리와 독일 뮌헨에 새 사무소를 세우고, 영국·아이슬란드와의 협업을 확대 중이다.
여기에 영국은 미국과 '테크 프로스페리티(Tech Prosperity) 딜'을 통해 MS, 구글, 엔비디아 등으로부터 310억파운드(약 60조원)에 달하는 AI·클라우드·양자컴퓨팅 분야 투자를 유치했다.
이처럼 미국 빅테크들이 유럽에 투자하는 이유는 최근 유럽이 미국과 중국 등 경쟁국들의 AI 투자에 자극돼 규제완화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최근 AI산업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유예기간을 늘리는 등 투자 친화적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때 '기술 규제의 본산'으로 불리던 유럽이 이제는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의 주요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미국 빅테크가 유럽의 산업 구조 전환을 가속화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힌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가 곧 유럽 제조업의 부활과 AI 경쟁력 확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외신은 짚었다. 오히려 미국 빅테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 내 상장기업의 약 75%가 아마존웹서비스(AWS)나 MS의 애저(Azure) 등 미국 기업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북유럽 일부 국가는 그 비율이 90%를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른바 '디지털 종속' 리스크다.
유럽이 외국 자본으로 AI 인프라를 구축하고도 정작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AI의 하청기지'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경 문제도 변수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과 냉각수를 필요로 한다. 영국 내 환경단체들은 "데이터센터 급증이 전력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기후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너지 위기 이후 '청정에너지 전환'을 국가 전략으로 내세운 유럽 각국에게는 역설적인 과제다.
결국 친환경 전력망 확충과 에너지 효율 혁신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AI 투자가 또 다른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빅테크 중심의 AI 투자 러시는 유럽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경쟁력을 잃어가던 제조업의 공백을 메우고, 에너지 고비용 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는 산업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이 기회를 '반전 카드'로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외국 자본 유치에 그치지 않고, 규제 완화·인재 육성·스타트업 지원·산업 생태계 확장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기자 admin@slotnar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