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광고 대행사 ‘이노션’에 9년째 재직 중인 김유빈(41)씨는 매일 아침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회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직장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출근한다. 김씨는 “어린이집이 가까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2017년 이노션으로 이직한 김씨는 다소 늦은 30대 중후반 결혼해 출산에 대한 걱정이 컸다. 광고 업계는 기본적으로 업무량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일하면서 난임 치료를 병행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이때 김씨를 도운 게 이노션의 ‘아기 맞이 휴직’ 제도였다. 난임 치료 등을 하는
근로자가 최대 1년간 휴직할 수 있는 제도다. 김씨는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 맞이 휴직 제도로 9개월 정도 쉬었다”면서 “회사에 다녔다면 아이가 찾아오지 못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김씨는 난임 휴직과 출산휴가, 육아휴직까지 2년 6개월 정도 쉬며 출산과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다.
4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이노션의 ‘직장 어린이집’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노션 직원들은 “회사와 어린이집이 차로 5분 거리로 가까워 출근해서도 마음이 놓인다”고 말한다./장련성 기자
이노션은 지난해 말 기준 여성 근로자
비율이 51%, 청년 근로자(만34세 이하) 비율이 44.5%에 달하는 회사다. 자연히 직원들도 육아나 출산에 관심이 많고 자주 대화 주제에 오른다. 이노션이 출산과 육아 관련 제도를 강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직원이 출산·육아를 병행하기 힘들어 일을 그만두면 경력이 단절되는 개인도 문제지만, 회사에도 큰 손해가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퇴사자를 대신할 새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교육하고 업무를 익히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더 소모된다는 것이다.
이노션은 ‘아이 맞이 휴직’ 외에도 임신한 직원이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있으면 최대 6개월간 쉴 수 있는 ‘임신 안정화 휴직 제도’도 운영한다. 또한, 출산한 지 1년 미만 된 여성 직원은 야간이나 휴일 근무에서 제외하는 제도도 있다. 직원이나
직원의 배우자가 출산하면 아기 용품을 선물로 준다. 이노션 측은 “프로젝트 중심으로 이뤄지는 광고 업계의 특성을 반영한 부분들을 제도화한 것”이라고 했다.
브랜드 인사이트팀 소속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이지희(38)씨는 “출산이나 육아 관련 제도부터 직장 어린이집 이용 등 혜택이 많아서 ‘회사가 아이를 키워준다’는 느낌을 받는다”면서 “직원들끼리 더 열심히 일해보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들도 이런 제도를 갖고 있지만, 회사나 상사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사용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노션은 직원들이 각종 제도를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겹겹의 장치를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직원이 아이를 가질 경우 소속 부서에 알리고, 임산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본인뿐 아니라 모든 부서원에게 전체 공지를 한다. 공지하는 ‘출산 제도 설명 파일’에는 제도별 법적 근거까지 일일이 썼다. 이노션 인사팀 관계자는 “임신한 직원은 별도로 면담해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알려주고 앞으로 회사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도 듣는다”고 했다.
2023년생 아이 아빠 김건희(34)씨는 3개월간 육아 휴직을 썼다. 그는 “육아 휴직을 썼던 시기에 회사에 일이 굉장히 많았지만, 팀원들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육아 휴직을 쓰라고 얘기해줬다”고 말했다.
출산이나 육아 관련 제도가 많고 실제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춰졌어도 휴직을 오래 하고 회사에 복귀했을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노션은 복귀 전 휴직자에게 어떤 업무를 하고 싶은지, 복귀 후 육아를 위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김유빈씨는 “휴직을 오래 하는 동안 회사 내부 개편도 있어 상사들이 모두 바뀌었는데도 복귀에 어려움이 없었고 적응 문제도 없었다”고 했다.
이노션에선 임신, 출산, 육아 휴직을 했다는 이유로 인사 평가에서 불이익을 입지 않는다. 평가 기간에 임신 기간이 6개월 이상인 경우 평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연봉, 성과급은 중간 등급을 적용한다. 이노션 관리자 중 여성 비율이 계속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인사 제도 덕분으로 분석된다. 지난 2021년 36.1%이던 여성 관리자 비율은 지난해 42.9%까지 늘었다. 이사회의 여성 비율도 30%에 달한다. 지난 1일 김정아 부사장이 여성으로 처음 대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노션은 현대차그룹 계열사인데, 현대차그룹 내에서 여성 CEO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이유로 이노션은 업계에서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직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의 ‘남녀고용평등 우수기업’ 심사에서 고용노동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이노션의 매출과 영업이익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22년 매출 1조7504억원, 영업이익 1369억원에서 지난해 매출 2조1206억원, 영업이익 1557억원으로 올랐다. 이노션 관계자는 “직원들이 회사 제도로 혜택을 받는다는 생각이 늘면서, 생산성도 그만큼 향상되는 것 같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