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다섯 번째다. 취업을 위해 정성껏 이력서를 작성하고 출근하듯 일자리 박람회장을 찾는다. 하지만 면접 부스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죄송합니다.”
5년 전 갖고 있던 연립주택을 처분해 생활비로 써왔고, 지난해 15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 4000만 원으로 어머니 부양비와 아내 병원비를 부담하고 있다. 그나마 가뭄의 단비 같았던 실업급여 170만 원은 이달을 마지막으로 끊긴 상황. 그래서 구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지난 16일 경기 지역 한 일자리 박람회장에서 만난 김영민(6
2·가명) 씨. 그는 준비 안 된 은퇴 후 벼랑 끝에 몰린 한국의 베이비붐 1세대(1955∼1963년생)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산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학업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고 일찍부터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출산율이 높았던 당시엔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해 가계에 이바지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중학교 졸업장만 들고 공장 운송직부터 막노동, 자영업, 전자부품 제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어려운 와중에 결혼해 딸을 키워 결혼시켰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6년 본격 시행된 임금피크제 등 사회적 변화가 그를 옥죄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김 씨는 “2009년에 입사한
전자부품 전문업체에 15년간 다녔지만 2018년부터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으면서 소득이 전년도에 받던 평균 350만∼400만 원보다 40% 가까이 줄었다”며 “실수령 월급이 190만 원인 것에 괴로워했던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지난해 정년을 맞아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후 그의 출퇴근 장소는 일자리 박람회와 취업센터로 바뀌었다. 김
씨는 “매번 ‘나이’라는 장벽에 부딪힌다”며 “이렇게 건강하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힘도 쓰는데”라고 가슴을 쳤다. “중장년층에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며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 박람회가 열리지만, 실제 벼랑 끝에 선 베이비부머의 재취업과 인생이모작엔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좌절감만 안기는 것이다. 그는 “지금 월세 살면서 가진 돈도 다 썼다”며 “지금 정말
심각한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재취업을 원하는 은퇴자들이 지난 28일 서울 도봉구청 일자리박람회 행사장에서 구인 기업 목록을 살펴보고 있다. 박윤슬 기자
벼랑 끝의 1세대 베이비부머는 김 씨만이 아니다. 28일 서울 한 구청 광장에서 열린 일자리 박람회장은 평일 오후임에도 베이비부머 세대로 보이는 500여 명이 몰렸다. 직원 6명이 나와 적극적으로 중장년층을 구인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여러 기업 부스를 찾았다 좌절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공공기관 시설관리직 출신 윤모(66) 씨는 “요즘 공공기관에서 기간제 근로자를 뽑는 곳도 없고 기업들은 대부분 60대 미만 근로자를 선호해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서울 중랑구 한 아파트에 아내·무직인 자녀와 함께 거주 중인 윤 씨는 “이러다 집 팔고 가진 것 다 팔고도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지하철 7호선 춘의역 대합실에서 열린 5070 일자리 박람회장에도 200명 넘는 중장년층이 몰렸다. 증명사진을 촬영하는 부스에만 20명이 줄을 섰고, 구인 기업 부스 대부분에 3∼5명이 대기했다. 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구직에 성공한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현장에서 만난 이모(65) 씨는 “인테리어 사업을 오래 하다 IMF 외환위기로 부도가 났다. 딸 셋과 함께 어떻게 버텨냈지만 지금도 당시의 빚을 갚고 있다”며 “2013년부터 2년씩 6번에 걸쳐 현장 시설관리회사에 다녔는데, 이젠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전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무조건 취업해야 하는데…”라며 어두운 표정으로 현장을 떠났다.
파산하거나 회생신청을 하는 이들로 북적이는 서울회생법원도 벼랑 끝에 선 베이비부머들로 북적이고 있다. 대다수가 굳은 얼굴로 법원 청사를 오가는 가운데, 22일 청사 앞에서 만난 신모(여·63) 씨는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까지 겪으면서 버텨왔지만 지금은 모아 둔 돈도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미용실을 운영하다 개인회생을 신청한 신 씨는 “부모도 모시고 자식들 키우느라 우리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들 중 노후 대책을 잘 마련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며 “법원에 다녀보니 파산, 개인회생 업무 하는 곳들에 나 같은 사람이 역대급으로 많은 게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떠나는 신 씨의 마지막 호소가 기자의 귓가를 울렸다. “‘100세 시대’라면서요. 한국은 60세 넘으면 일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노기섭·이은주·성윤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