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현국 시인·시와반시 주간
천고마비라는 말이 그러하듯이, 이제 아무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들먹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에 관한 책을, 아마도 대부분 이 서문까지만 보고 옆으로 밀쳐두게 될 이 책을 출판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나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흔적일 뿐이지만 이/그 흔적이 언젠가 우연히 지나가는 누군가의 사유나 사건에 (의미나 영향은 아니겠지만) '효과'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간이 여전히
지금처럼 인터레그넘의 시대라면…" 노태맹 시인이 최근에 출간한 평론집, 『푼크툼의 순간들』 서문 부분이다. '서문까지만 보고 옆으로 밀쳐두게 될 이 책'이란 말에 가슴 찔렸다. 푼크툼의 순간이었다. 왜 그는 그런 말을 했을까? 오만과 편견으로? 겸양과 예의로? 아니다, 사실이 그랬다. 진심이었겠다.
문학에 무관심한 사람은 읽지 말고 이 부
분은 건너뛰기를 바라거니와 … 바우만,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피에르 마슈레, 질 들뢰즈, 롤랑 바르트, 알랭 바디우, 퀑탱 메이야수, 승조, 미셸 세르, 하이데거, 아리스토텔레스, 스티븐 샤비로, 메를로 퐁티,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비트겐슈타인, 자크 비데, 데이비드 니런버그, 리카도 니런버그, 에티엔 발리바르, 지바 마사야, 카렌 바라드,
레비나스, 미셸 앙리, 토머스 네일, 릭 돌피언, 브뤼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렌조 트라베르소, 스피노자, 지그문트 바우만, 조르조 아감벤, 질베르 뒤랑, 자크 랑시에르, 모리스 블랑쇼... 등과 함께 사유의 옷감을 재빠른 바늘처럼 촘촘하게 들락거려 만든 텍스트이다. 어찌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스포츠 웨어일 수 있겠는가?
인터레그넘이
란 권력의 공백기를 뜻하는 말이다. 로마에서 황제가 사망했으나 아직 새 황제가 즉위하지 못한 상태의 무질서와 혼란의 가능성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 용어를 근대사회의 사회적 격변기의 의미로 사용했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람시의 용어를 확장하여 현대의 세계화 시대를 '인터레그넘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는 자본의 통합과 문화의 소통
에서 세계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는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푼크툼의 순간들』의 출간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기도 했고, 내 삶의 한철이 여전히 지금처럼 인터레그넘의 시대일 것임이 분명하므로, 서문만 읽고 밀쳐둘 일이 아닐 것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흔적일 뿐"으로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밑줄을 그어가며, 느리게 읽었다. 독후감을 말하건데 세잔의 냉(冷)한 이마와 샤갈의 열(熱)한 가슴을 가진 문체, 문학과 세계의 병적 징후에 대한 진단과 처방, 그를 위한 안간힘의 흔적이 역력한 글들이었다.
그리움은 유토피아에 미리 다다른 과거의 감각과 정서다. 그러나 그 과거는 미래 보다 언제나 앞서 있어서 우리가 부르지 않으면 뒤로 고개를 돌려보지 않는다. 그리움은 우리가 시로, 노래로, 통곡으로 부를 때에만 나타나 우리를 쳐다본다. 그 그리움이 우리를 현재로 소환하고 호명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대가 나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듯이 미래의 언젠가에는 내 가난한 시가 당신 슬픔의 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만이 나의 위로가 될 거에요. 들어주세요. 나의 사랑, 이 지상의 詩! 그리하여 詩와 같은 이 그리움은 우리의 슬픔과 위로와 革命에 쓰여 집니다. ('그리움은 어디에 쓰일까?' 부분)
그리움의 문학적 쓰임을 해명하고 있는,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위의 글은, 여기까지 오느라 애쓰고 수고한 독자에게 건네는 손수건처럼 따뜻했다. 그러나 의사 시인 노태맹이 건네는 손수건은 위로의 표징이라기보다는 작금 우리 문학현실에 대한 경고라는 생각이 앞섰다. 지적 게으름은 시인의 노화를 촉진시키는 주범이 분명하다.
